|  뉴스  |  벼룩시장  |  구인구직  |  상호록  |  독자게시판  |  About Us

Copyright © 2018 Korea Review

Banner.jpg
WebBanner.jpg
Kokos.jpeg

특집] "'와이탕기 데이'의 유래와 의미"

February 7, 2020

(사진: 와이탕기 조약 체결 장면)

 

2월 6일은 ‘와이탕기 조약(Treaty of Waitangi) 기념일’이다. 흔히 ‘와이탕기 데이’로 알려진 이날은 뉴질랜드라는 국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된 날이다. 

 

 

<와이탕기 조약이란?>

유럽인으로 뉴질랜드에 처음 온 이는 네덜란드의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지만 실제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유럽인은 영국의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 일행이다.

1769년 쿡 선장의 도착 후 고래잡이 어부들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다가 다수의 유럽계 이주민들이 뉴질랜드에 아예 정착했고 1839년 무렵에는 그 숫자가 2,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토착민인 마오리 인구는 11만 5천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런데 이민자들의 불법행위가 급증하자 영국정부는 1833년에 제임스 버스비(James Busby)를 총독 대리로 임명했다. 

1835년부터 경쟁국인 프랑스인들의 정착이 시작되자 영국은 뉴질랜드가 영국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북섬 마오리 부족장들을 중심으로 영국의 통치 아래 독립을 선포하게 했다.

그러나 계속 문제가 불거지자 영국 정부는 좀 더 효율적인 법이 필요하다고 판단, 1840년에 영국 해군의 윌리엄 홉슨(William Hobson) 선장을 부총독으로 보내 마오리 부족장들과 이른바 와이탕기 조약을 맺게 했다. 

1840년 2월 6일 북섬의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있는 와이탕기에서 43명의 북쪽 부족장들이 먼저 서명한 이 조약은 그 후 전국을 돌며 500여명 이상의 부족장들로부터 서명을 받아 완성됐다. 

 

 

<조약의 내용과 문제점>

과거 제국주의 시절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 맺었던 조약 대부분이 현재는 사문화된 것과는 달리 이 조약은 지금까지도 뉴질랜드 법과 사회의 근간으로 남아 있는데 근대에 와서는 문구 해석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영어와 마오리어 3개 조항으로 만든 이 조약은 사전에 법률가들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지 않았고 언어별 버전에 따라 해석에서도 큰 차이가 발생해 현재도 마오리와 정부 간에는 논쟁이 계속되는 빌미가 되고 있다. 

첫 번째 조항은 통치권에 대한 것인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는 그들의 '카와나탕가'(kawanatanga, 통치권 또는 통치 직위)를 영국 왕실에 넘긴다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마오리 버전에는 권력을 공유한다고 되어 있다.

두 번째 조항은 '티노랑가티라탕가(Tino rangatiratanga)' 또는 족장제도에 연관되어 있는데, 마오리 버전에는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타옹가'(Taonga, 보물) 소유에 대한 더 넓은 권리를 약속하고 있으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에게 토지와 임야, 바다(어장), 그리고 다른 부동산에 대한 통제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 버전에서 사용한 '타옹가' 라는 말에는 언어와 문화 같은 것들의 소유와 보호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어 더 문제가 된다.

세 번째 조항에서는 마오리에게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모든 영국의 것에 대한 권리도 약속하고 있다.

 

 

<와이탕기 분쟁 재판소(Waitangi Tribunal) >

와이탕기 조약에서 마오리들은 영국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상으로는 마오리들은 많은 권리를 침해당했다. 

이는 특히 토지 매매 과정에서 심각하게 발생해 1860년에는 북섬 중앙부를 중심으로 마오리 토지전쟁이 대규모로 발발, 수년간 지속되면서 수많은 마오리들이 죽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19~20세기에 걸쳐 많은 마오리 부족들이 부족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상실했는데, 그 중에는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친 경우도 많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마오리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는 문제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1975년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기 분쟁재판소를 설립하였으며, 이 법정에서 마오리 부족들의 요구에 대해 금전지불이나 땅의 형태로 보상하는 판결들이 내려졌다.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재판도 꽤 되는데 판결로 내려지는 보상들은 대부분은 해당 부족민들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 사업 등에 투자되고 있다.

1984년 당시 집권당이던 노동당 정부는 마오리들이 국가를 상대로 하는 청구소송을 184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도에는 노동당 정부에 의해 입법된 해저, 해안법에 대해 집권당 내에서도 갈등이 일어 당시 마오리부 장관이던 투리아 의원이 탈당, 새로운 마오리 정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돼기도 했다. 

 

 

<오늘날의 상황>

조약이 맺어졌던 장소는 유명한 관광지가 됐지만 실제 조약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높지 않은데 한 조사에서는 조약 체결연도를 아는 사람이 34%에 불과했다. 

반면 조약이 무용화되고 있다는 점에는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며 특히 비마오리계에서는 조약으로 오히려 인종간 갈등이 조장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또한 한 조사에서 비마오리계는 자신을 '뉴질랜드 국민'으로만 생각하는 것에 비해 마오리계는 34%가 자신을 개별적인 '민족'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그 다음에서야 뉴질랜드 국민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이 조약과 뉴질랜드라는 국가에 대한 의식에는 민족별로 큰 의식의 차이가 있다.

2004년에 국회에서 와이탕기 기념일을 ‘뉴질랜드 데이’로 바꾸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실제 1970년대에는 2년간 명칭이 뉴질랜드 데이로 공식 변경된 적도 있다.

매년 와이탕기 데이 때면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참석해 조약체결 장소에서 기념행사가 열리지만 지난 2004년에는 국민당 대표가 진흙 세례를 받기도 했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뉴질랜드의 브랜드 신뢰도 연례 조사에서 와이탕기 재판소가 가장 믿을 수 없는 정부기관의 하나로 꼽히곤 하는데, 이처럼 와이탕기 조약은 건국의 기초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불신을 받는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코리아리뷰]

 

(사진: 박물관에 보관 중인 와이탕기 조약문서)

 

Share on Facebook
Share on Twitter
Please reload

​뉴스 카테고리
Please reload

​최신 뉴스
Please reload